그 자체로 아름다운 생명이어라

분야
한국에세이
포토에세이
저자
정성한 지음
쪽수
144
판형
160*171*16mm / 345g
정가
₩13,000
ISBN
9791198380470
발행일
2023/12/25

책 속으로

#1
권정생 선생님이 쓰신 동화, ‘강아지 똥’을 아시나요. 돌담길 아래 강아지 똥이 민들레 새싹을 품어 안고 녹아서 하늘의 별만큼이나 아름다 운 민들레 꽃을 피우게 한다는 이야기지요. 봄을 기다리는 복숭아 작은 꽃망울 바로 옆에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똥을 누었네요. 크기로 보아 꽃망울이나 똥이나 비슷한데, 저 새똥도 꽃망울을 품어 안고 녹아서 꿀처럼 다디단 복숭아 익어지게 할까요?
정성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생명이어라〉 중.
#2
지난 주중에 비가 흠뻑 온 후 날씨가 따뜻한 탓에 영 피지 않을 것 같던 꽃들이 많이 피어났습니다. 꽃은 일곱 차례에 나누어 피어납니다. 모든 꽃 눈이 한꺼번에 피는 게 아니라, 일곱 형제 태어나듯 그렇게 차례로 피어난다는 뜻입니다. 제일 먼저 피는 첫째는 모두 4월의 냉해에 죽습니다. 둘째와 셋째는 잘 수정되어 열매가 되는데, 둘째가 제일 튼실하지요. 넷째는 씨까지 생기다 떨어지고, 다섯째와 여섯째는 늦게 핀 까닭에 수정되지 못한 채 떨어집니다. 막내 일곱째는 형아 언니들 다 필 때 고집 피우며 꼭 숨어 있다가 둘째 셋째가 다 커서 익어갈 무렵인 여름에 빼꼼히 얼굴을 내밀지요. 엄지손가락만 한 열매도 남기는데 제법 맛있답니다. 저 집은 잎눈 하나에 꽃눈이 칠 형제네요.
정성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생명이어라〉 중.
#3
‘여럿이서 함께 피는 꽃’ 농장에는 철 따라 다양한 꽃이 피고 집니다. 무심한 농부가 눈길 한번 주지 않아도 해마다 제철에, 제 자리에 저렇게 바람에 흔들리며 피었다가 지지요. 문득, 들꽃 중에 여럿이서 함께 꽃 한 송이를 이루어 피는 꽃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가까이 보면 여럿인데 멀리 보면 하나인…. 자연에서 배운다지만, 정말 배울 걸 배우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봅니다. 모진 비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때 맞추어 제 자리에서 함께 피어나는 들 꽃봉오리처럼, 그렇게 사랑으로 뭉쳐진 삶이 되고 싶습니다.
정성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생명이어라〉 중.
#4
아기가 태어나기까지 임신 기간은 10개월이지요. 송아지도 10개월이고요. 닭은 3주, 21일입니다. 혹 복숭아에도 임신 기간이 있다면 믿으시겠나요? 복숭아는 좀 독특한 생체주기를 가진 듯합니다. 매년 6, 7월이면 이듬해 열매를 결정짓는 꽃눈이 형성되니까요. 이때 나무의 영양 상태에 따라 잎눈이 되기도 하고 꽃눈이 되기도 하지요. 영양이 적당하면 잎눈과 꽃눈 비율이 적당하고, 과하면 잎눈이, 적으면 꽃눈이 많아지지요. 이제 이 글을 처음부터 읽으신 벗님들이 라면 ‘잎눈과 꽃눈’이라는 말, 아시지요? 그러고 보면 이제 막 수확을 시작한 복숭아나무는 이미 임신 2개월은 되었네요? 하하. 사진은, 붉게 익은 복숭아를 달고 있는 가지의 잎 마디에 형성된 꽃눈들인데, 보이지요?
정성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생명이어라〉 중.
#5
그 자체로 아름다운 생명이어라! 과수원을 거닐며 복숭아나무들의 상태를 살피다가 발아래 밟히는 이름 모를 풀들의 마른 꽃과 그 씨앗에 눈이 갑니다. 한땐 농부의 마음을 매우 심란하게 했던 존재들이지요. 예초기의 무지 막한 칼 날도 피해내며 당당히 제자리를 꿰찬 생명입니다. 이젠 메마른 풀 되어 밟히지만, 제 몸에 붙어 있는 마지막 씨 한 톨까지 땅에 떨어 내려고, 바람과 이슬과 비와 햇볕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고 있네요. 인내를 가지고 한자리에서 오래 들여다보면, 누구에게나 말 걸어주는 아름다운 생명입니다.
정성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생명이어라〉 중.
#6
새들도 먹이를 저장해 놓는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텔레비전 방송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호랑이나 사자가 사냥해 잡은 짐승을 먹다 남기고는 어딘가에 숨기거나 나무 위에 올려놓지요. 다람쥐는 도토리를 땅속에 숨기고요. 어떤 새가 도마뱀을 잡아 나뭇가지 위에 걸쳐 놓았었네요. 아마 다음에 먹으려 했거나 사랑하는 짝을 위해 몰래 숨겨두었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고만 깜빡했는지, 둔 곳을 찾지 못했는지, 누군가에게 줄 이유가 없어져 버렸는지…. 그대로 말라버렸네요.
정성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생명이어라〉 중.
#7
웬일인지 올겨울엔 농장의 닭들이 알을 낳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추운지 알을 꺼내 보면 이미 꽁꽁 언 상태에서 터져 있곤 합니다. 암탉들이 그 사실을 알려나요? 복숭아 어린 꽃망울들도 올겨울 추위는 참 힘겨운 듯합니다. 어린 가지들이 꽃망울들을 추위에서 지키려는 듯, 새털 잠바를 서로 돌려가며 입네요.
“언니, 이젠 언니가 입어.”
“아냐, 괜찮아. 네가 더 입어.”
“언니도 춥잖아. 자, 어서 받아.”
참! 얼어 터진 달걀, 부침했더니 작은 호떡처럼 되네요.
정성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생명이어라〉 중.
#8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옥동은 참 기구한 운명의 여인입니다. 그녀의 눈은 평생 바다 쪽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바다는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되는 곳, 생존 그 자체이지요. 엄마를 끔찍이 미워한 아들 동석과 생의 마지막 여행을 하다 바다 반대편에 한라산이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기어코 한라산에 올라갑니다. 한 곳만 보았던 게 너무 억울해서…. 두 달째 나무만 보다 문득 하늘을 보았습니다. 커다란 독수리 두 마리가 머리 위를 빙빙 돌고 있습니다. 나도 저들도 놀랐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들킨 걸까요? “하늘에서도 하늘 보니?”
정성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생명이어라〉 중.